기본소득 도입 논의를 정치권 핫 이슈로 끌어올린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장 도입하자는 게 아니라 장기 과제로 연구를 해 보자는 것'이라는 취지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해 증세를 하자거나, 기존의 복지체제를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하자는 취지의 주장에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김 위원장은 4일 오전 비대위 회의 공개발언에서 "포용성장을 위한 각종 제도를 확립하고, 보건 체제를 재정립하며, 4차 산업혁명을 위한 여건 조성과 아울러 이로 인해 파생되는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논의는 서구에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 이론가들의 고안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진보진영 일부 학자들이 연구를 주도해 왔다. 실제로 김 위원장의 언급에 대해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이날 김 위원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대환영"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날 오후, 예정에 없던 기자 간담회를 열어 속도 조절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최근 코로나 문제로 인해 1~3차 추경까지 가며 적자재정 상황이 시작되고 있는데, 이런 재정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당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며 "정책은 지속 가능성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기본소득 도입 시 필요한 막대한 재정 때문이다. 그는 "기본소득은 장기적으로 소득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에, 재정 조달이 장기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이 1차적(문제)"이라며 "현 우리나라 세입수준을 가지고 기본소득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요원하다"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그럼에도 기본소득을 거론한 이유에 대해선 "앞으로 산업사회가 인공지능(AI)이 투입되고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생산 방법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한국)도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기본소득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고, 재정으로 어떻게 뒷받침할 것이냐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당과 정치권은 정책을 개발하고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이것(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서구에서 시작돼 2010년대 한국에도 도입된 기본소득 논의의 전개 과정을 일별하고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대두되면서 '그러면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면 고용 문제가 심각해질 텐데, 실업상태에 빠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이며 기계가 생산한 물건을 소비할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생산이 진행될 수 있겠나' 하는 취지에서 기본소득이 거론됐고, (이는) 소득보장을 위한 논의"라고 정리하며 "그런데 기본소득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줘야 하는지, 어떤 부류에게 줘야 하는지 등은 세계적으로도 정론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실 경제정책에서 국민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 고용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이다"라며 "고용이 가능하면 기본소득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영국 옥스포드대의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4차 산업혁명으로 미국 고용의 47%가 없어질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니 기본소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이런 취지에서, 노령기초연금이나 청년층 취업준비 인구에 대해 일정한 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은 "(원래의) 기본소득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정치권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앞으로 언젠가 할지 모르는 것에 대해 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여야 간 공동 연구 등의 필요성에는 공감을 표했다.
그는 특히 "각 나라 정부가 각자 복지정책을 가지고 여러 복지(제도)를 하고 있지 않느냐"며 "'그것을 다 합하면 기본소득이 될 수 있지 않나', '정부가 제공하는 여러 시혜를 다 묶으면 (기본소득 재원이) 되지 않느냐'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그건 턱도 없는 얘기다. 복지 구조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이 섣부른 기본소득 도입에 제동을 건 이유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존 복지 체계를 축소하지 않으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난색을 표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19% 정도인데 현재 조세부담률도 국민은 높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 세금을 부과할 적에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그는 "복지를 늘리려면 당연히 증세를 안 할 수 없는데, 증세 문제를 함부로 논의할 수 없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정의당이 주장하는 '부유세'나 문재인 정부 정책기획위원회 등에서 언급된 '부가가치세 5% 인상' 등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부유세를 가지고 세원이 얼마나 확보되겠느냐? 그것을 가지고는 큰 복지를 할 수 없다"거나 "과연 부가세를 5% 올릴 수 있겠나?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부정적·긍정적 면을 다 배려해야 하는데 세금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비과세감면 축소에 대해서도 "그거 축소한다고 재원이 얼마나 나올 거라고 상상하느냐"며 일축했다.
그는 또 "보편적 기본소득을 하려면 엄청난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기본소득의 가장 큰 문제가, 일하려 하는 인센티브(동기)를 억제해서 고용 기회를 가진 사람도 적당히 기본소득으로 살려고 하는 상황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함부로 주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라고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은 우리가 아직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실업이 크게 발생하는 등의 상황이 도래하지 않고 있고,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꼭 발생했다기보다 연구자들이 가상으로 만든 것"이라며 "(오스본 교수가 말한) 47%라는 것도 인간이 하는 생산을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범주를 극대화해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16년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 대표로)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면서 '4차 산업혁명을 하니까 기본소득도 검토할 단계에 와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에 우리나라 기본소득학회라는 곳에 가서 보니까 연구하는 분도 많지 않더라. 그 개념이 갑자기 정치권에 뛰어들어왔는데, 신중하지 않게 정치적·피상적 판단으로 논의할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앞서 청와대는 지난 3일 이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는 구체적 수준의 논의를 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재원이 막대하게 늘어나는데 어떻게 조달할지 등 스터디(연구)가 있어야 한다"면서 "(주장하는 이들도) 당장 하자는 취지는 아닐 것이다. 상당한 기간을 정해 토론을 먼저 한 이후에야 본격적 고민을 해볼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기본소득 공론화의 필요성에는 김 위원장과 청와대, 여야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치권이 꺼리는 증세 외에는 현실적인 재원 마련 방안이 마땅치 않아 구체적인 정책으로 진전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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